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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다리의 과학성 ,한국의 아름다운 성

skebinzer 2014. 3. 12. 22:50

 사료로 본 다리의 기원
우리나라의 경우 문헌 속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실성니사금조實聖尼師今條’에 “12년 추8월 신성 평양주 대교十二年 秋八月 新成 平壤州大橋”라는 기록(413년)이다. 이를 통해 평양주 대교 이전에도 이미 다리를 설치하여 사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동성왕조東城王條’에 ‘12년 설 웅진교十二年 設 熊津橋’라는 기록(498년)도 있다. 이를 보았을 때, 백제에도 상당한 수준의 건축공학적인 다리가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추고천황推古天皇 20년(612년)에 백제 토목기술자인 노자공路子工이 일본에 건너가 오교吳橋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백제인들이 다리축조에 있어 기술을 수출할 정도로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도 마찬가지로, 5세기 초에 만들어진 거대한 규모의 목교지가 조사·보고되었는데, 굵은 밤나무 각재를 사용하여 귀틀모양으로 짜 올린 골조 위에 견고하고 튼튼히 맞물린 지지보를 놓은 다음 두꺼운 깔판을 대어 다리를 만들었다. 골조에는 기둥구멍과 함께 이음흔적이나 사개물림 등의 결구 흔적이 잘 남아 있어, 삼국 중에서 가장 발전된 교량축조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게 오래되고 큰 목교로서, 고구려인의 놓은 토목기술을 잘 엿볼 수 있다.

이렇듯 문헌적인 고찰과 몇몇 유구遺構를 살펴볼 때, 옛 다리는 삼국시대 이래 지속적으로 발전된 모습으로 축조·이용하여 민족적 정서가 함유되어 있는 동시에 도성이나 궁궐 내의 권위를 의미하는 전달어로, 불토국을 의미하는 상징어로, 상당한 수준의 과학적 사고가 깃든 구조물임을 보여준다.

 옛 다리의 속살
옛 다리의 소재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쓰러진 나무나 돌 등이 주로 사용되었다. 초기에는 약간의 가지치기를 한 나무나 평평하게 생긴 돌을 그대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다리의 초기 형태인 나무다리는 습기에 약한 탓에 부후腐朽 또는 부식되어 그 예를 찾기 힘들다. 하지만 가공성이 뛰어나 연장과 도구의 발달과 맞물려 정교하고 다양한 형태의 다리가 축조되었을 것이다. 나무다리는 대부분 전통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침엽수인 소나무로 강송이 으뜸이다. 나무다리에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외나무다리부터, 과학적 원리와 사고로 축조된 평목교, 누교, 향교 등이 있다.

돌다리는 나무다리에 비해서 시간, 재력, 공력이 많이 들지만 재료구입이 용이하고 반영구적인 특성이 있다. 처음에는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약간 가공하여 설치되기도 하였으나, 도구의 사용으로 차츰 치밀한 구조로 발전하였다. 돌다리를 축조할 때는 돌다리의 기초나 교각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돌과 돌 사이의 접합에 금속 은장隱藏을 사용했다.
다리의 종류를 살펴보면, 가장 초보적인 다리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 징검다리가 있다. 주로 얕은 개울가에 건너기 좋도록 보폭에 맞춰 큼직한 돌덩어리를 듬성듬성 놓아둔 형태다. 이것은 인체의 동작에 대한 행태를 반영한 매우 인간공학적(에르고믹스)인 대치구조이다. 그래서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징검다리에는 물의 흐름을 방해하는 요인이 있다. 이 단점을 극복하여 발전한 것이 널다리이다. ‘널빤지로 만든 다리’를 뜻하며, 이로부터 ‘판교’라는 땅 이름이 생성되었다. 그 이름도 다양해 보다리, 농다리, 평석교로도 불리는데 오늘날까지도 널리 사용된다. 청원 문산리 석교, 진천의 농교, 청주의 남석교 등이 현존하는 오래된 널다리로 고려시대에 축조되었다.

 

 하지만 널다리는 폭이 넓은 곳은 건너기 어려워, 그 단점을 보안하여 구름다리가 만들어졌다. 구름다리는 옛 다리 중에서 가장 발전된, 과학적인 다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과학적 사고가 지표면과의 접촉 없이 다닐 수 있는 전혀 색다른 다리로 발전한 것이다. 상부하중이 홍예(arch)의 축선을 따라 전달되며 다리의 하부에는 인장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구조적으로 안정되게 설계한 매우 공학적이고 과학적인 다리다. 오늘날까지 이러한 과학적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어 조형성이 돋보이는 다리가 건설되고 있다. 구름다리는 성곽이나 사찰, 궁궐의 중요한 다리로 널리 사용되었다.
우리 조상은 일찍이 이러한 다리의 원리나 기능에 만족하지 않고 다리가 생활의 일부가 되도록 하는 데까지 미치게 되었다. 다리가 생활 그 자체를 충족시키는 설비(equipment)가 되도록 축조된 것이 누다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누각이 있는 다리인데, 누교 형식은 공간적으로 전이공간이고 완충공간이며, 기능적으로는 연결기능과 풍류기능을 겸비한 합리적인 형태다. 이러한 누교의 예도 『삼국사기』에 원성왕元聖王 14년(798) 3월, “궁남누교가 불탔다宮南樓橋災”라는 기록이 있다. 다리 위에 회랑식 건물이 있는 목교였음을 추정하게 되는데,  예로 백제 무왕 때 조성된 익산 미륵사지의 다리도 이와 같은 형식이다. 현존하는 대표적인 누교는, 송광사 삼청교의 우화각, 청량각 누교, 곡성의 능파각 목교, 수원화성의 화홍문 등이다.

배다리는 배를 일정한 간격으로 벌려 놓고 그 위에 가로목을 질러 놓은 다음 널을 깔아 바닥을 만든 다리로 부교 혹은 주교라고 하는데, 깊고 폭이 넓은 강가나 바다를 건너기에 이전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해 부력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고려 정종 1년(1045)에 임진강에 가설되었는데 “선교가 없어 행인이 다투어 건너다 물에 빠지게 되는 일이 많으므로 부교를 만든 뒤로 사람과 말이 평지처럼 밟게 되었다”라고 한 것을 보아 배다리를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 뒤 이성계가 요성을 공격할 때와 위화도 회군 때 부교를 가설하기도 하였다.
배다리에서 발전한 형태가 매단다리이다. 배다리가 깊은 계곡이나 낭떠러지에는 도움이 되지 않아, 아주 새로운 방법과 기술이 요구되어 탄생했다. 길을 내기 어려운 낭떠러지나 절벽과 절벽 사이에 줄이나 쇠사슬 따위를 가로질러 줄의 지탱력으로 한 사람이 간신히 건너는 정도의 다리다. 매단다리는 오늘날 남해대교와 같은 현수교의 조형으로 옛 선조들의 탁월한 공학성과 조형성이 돋보이는 창의적인 다리로, 오늘과 같은 거대한 대교大橋로 발전하였다.

 

 옛 다리가 품고 있는 정신적 가치
우리의 옛 다리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과학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보다 치밀하고 합리적인 다리로 발전하였음을 확인했다. 옛 다리는 역사적인 삶의 흔적과 정신적인 얼이 담겨져 있으며 과학성이 스민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기능적이고 조형적인 다리뿐만 아니라 시공을 뛰어 넘어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역사의 통로로, 단절된 세대 간, 지역 간의 새로운 소통의 통로로 다가와 답답하게 막혀있는 오늘날의 세상을 시원스럽게 뚫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옛 다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글|사진ㆍ황세옥 한국고건축문화재연구소장   사진ㆍ문화재청

 아름다운 성, 한국에는 없다고?-한국은 성의 나라였다

 

한국인들을 사로잡는 외국의 멋진 이미지 중 하나가 근사한 성일 것이다.
디즈니랜드의 모델이 된 독일 남부의 노이슈반스타인성이나 포르투갈의 동화같은 성 페나 궁전을 보면

왜 우리나라에는 저렇게 멋진 성이 없나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다.


▲ 독일 퓌센에 있는 노이슈반스타인성. 중세 성처럼 보이지만 1880년 지은 아주 젊은 성이다.

   게르만 신화에 푹빠졌던 몽상가 왕 루트비히 2세가 중세 성에 대한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나랏돈을 많이 들여 이 성을 짓느라 국가 재정을 파탄내고 말았다. 
 


▲ 포르투갈 신트라의 페나 궁전. 역시 1885년 지은 젊은 성이지만 온갖 환상적인 이미지를 짬뽕해 사람들을

   잡아끄는 매력으로 유명하다. 신트라는 지역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그러나, 한국이야말로 성이 많은 나라다. 한국의 성은 `읍성'이다. 동네 전체를 성이 둘러싸는 구조다. 조선시대 거의 대부분의 도시들이 이 읍성이었다. 서울도? 맞다. 서울은 전체가 도성이란 더 큰 성이었을뿐, 전체 구조는 똑같다. 서울 자체가 성이었고 도시였다.
문제는 이 읍성들이 대부분 사라져 우리 나라 도시가 성곽 구조며, 멋진 성들이 수두룩했다는 사실을 모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왜 성들이 없어졌을까. 이유는 간단하고 슬프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 합병하면서 성들을 없앤 것이다.
일본의 침략에 맞서던 구한말 의병들은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들에 창과 몽둥이 등 열악한 무기로 싸웠다. 그럼에도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고 때론 일본군들에게 만만찮은 타격을 입혔다. 우리 읍성을 잘 활용해 방어와 공격을 펼쳤던 덕분이었다. 익숙한 지리와 지형 지물, 그리고 성을 활용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의병들 때문에 혼쭐이난 일본은 이후 읍성을 대부분 헐어벼렸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우리의 읍성을 잊어버리게 됐다.
 
조선이 읍성을 많이 지었던 것은 전쟁에서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읍성 안에는 주거지가 있고, 읍성 바깥에는 경작지가 있었다. 전쟁이 나면 모두 읍성 안으로 들어가 적들과 맞섰다. 이런 읍성이 전국에 200여곳이 있었다. 가히 조선은 `성의 나라'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읍성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가장 잘 보존이 되어 있는 순천 낙안읍성이 대표적이고, 동래읍성, 해미읍성, 경주읍성, 고창읍성, 홍주읍성, 언양읍성, 장기읍성 등등만 남아있다.
 
비록 그 수는 적어도 남아있는 우리 성들 중에선 정말 외국 성 못잖게 삐어난 곳들이 있다. 초가지붕과 돌벽이 잘 어우러지는 낙안읍성은 보기만해도 포근하고 정다운 성이다. 성안 옛 건물들은 다 사라지고 복원한 성벽만 남은 해미읍성은 묘한 상념과 향수에 빠지게 하는 감상적인 맛이 일품이다. 그러나 모두 규모가 작아 좀 아쉬운 편. 그러면 정말 웅장하고 폼나는 우리 성은 없을까?
있다. 최고의 한국 건축물로 꼽히는 웅장하고 장엄한 성, 그러면서도 너무나 돌아보기 쉬운 최고의 산책 코스가 되는 성이다. 그곳이 바로 수원 화성이다.
 
정조가 지은 신도시 수원의 화성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성이다. 전통건축의 아름다움, 그리고 도시 전체를 굽어보는 조망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진짜 우리 성을 보고 싶다면, 모처럼 하염없이 걸으며 정취를 즐기고 싶다면 수원 화성만한 곳이 없다.
 
수원화성은 우리 건축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가봐야 하는 곳이다. 그 이유는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하고 멋있고, 귀여운 건물들이 이 성에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는 성벽이 다 복원되어 성벽 위로 수원을 정확하게 한 바퀴 돌 수 있어서다. 가족들과 함께 걷기에 이렇게 좋은 코스는 찾아보기 힘들다. 

어느새 여름, 다시 한번 수원화성을 가보고 싶어져 지난해 가을 찍은 화성 사진들을 올린다. 칙칙한 갈색 대신 눈부시게 푸른 빛이 화성을 감싼 모습을 소개하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사진이 없는 점을 양해해주시길.  

가족들과 함께, 연인과 함께 건축과 역사를 만나고 싶으면 올 여름 화성을 거닐기를 권한다.
 
화성을 이해하려면 전체 구조를 봐야 한다. 수원 중심부를 동그랗게 성이 두른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클릭하면 커진다. 

 

 
저 성벽 전체를 걸어서 돌아볼 수 있다.
수원화성은 산을 따라 들어섰기 때문에 어느쪽으로 도느냐가 중요하다. 전체를 다 도는데에는 제법 시간이 걸리므로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은데, 굳이 완주를 하겠다면 팔달문 옆 오르막으로 시작하는 코스를 권한다. 처음에 화끈하게 비탈을 오른 뒤 그 다음부터는 계속 완만한 내리막이어서 편하게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수원의 구 이름은 수원 화성의 문에서 따온 것들이 많다. 팔달문에서 팔달구, 장안문에서 장안구가 나왔다. 이 팔달문은 수원 시내의 중요한 랜드마크다. 바로 옆에는 번잡한 시장이 있고, 이 문을 중심으로 길이 돌아간다. 거리 저편에 보이는 아름다운 성문의 위용은 서울 남대문이나 동대문에서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멋지고 장중하다.
 



팔달문을 비롯한 수원성들의 문은 적군이 문을 공격할 때 적군을 에워싸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옹성이 앞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동그랗게 둘러싸인 저 벽이 옹성이다. 서울에서는 흥인지문만 저 옹벽이 있다.
 
이 팔달문 사진 왼쪽으로 성벽 올라가는 길이 있다. 이 길부터 화성을 돌면 초반에 약간 땀을 흘린 뒤 계속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며 구경할 수 있다. 

  


 
바로 이 길이 팔달문 옆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저 계단이 압도적이라고 겁먹지 말기를. 생각만큼 오래 올라가지 않는다.

물론 힘은 든다. 그래도 그 다음은 천국이다. 

  



조금만 걸어 올라간 뒤 뒤를 돌아보면 수원 거리가 눈 아래 펼쳐진다. 힘은 들어도 올라갈수록 좋아지는 전망이 발걸음을 부추긴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성벽 중간 공격과 방어를 위해 만든 포루가가 나온다. 제법 가파른 이 길을 좀더 편하게 오르는 법은 `이걸 지은 사람들도 있는데 뭘'이라고 생각하는 것.  

  


 
왼쪽으로 이어지는 성벽을 따라 끝까지 오르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오르는 길은 수원 화성

남쪽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길이다. 경사가 완만해지나 싶으면 정상이다. 그리고 첫번째 포인트인 서남암문이 나온다. 

  



암문은 적들이 잘 못보게 움푹 패인 곳이나 지형지물에 감춰지는 곳에 만든 문이다. 저 서남암문은 정식 문처럼 보이는

 편인데, 저 문 밖으로 적을 공격하는 포사가 있으니 잠깐 나가봐야 한다.  

  


 
바깥에서 본 문은 전혀 다른 이미지다. 돌과 벽돌로 쌓은 단단한 문 위에 모자를 쓴 듯 경쾌한 모양의 누각이 올려졌다.

이 길을 조금 더 가면 서남각루가 있다.
서남각루를 구경하며 잠시 숨을 돌리고 저 문안으로 되돌아가 산길을 따라 걸으면 수원화성 최고의 전망대인 서장대다. 

  



제법 넓은 길 저 끝에 서장대가 보인다. 가까이갈수록 서장대의 독특한 모습이 점점 다가온다. 

  



장대는 전쟁 때 사령관이 전투를 지휘하는 곳이다.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짓기 때문에 평소에는 기막힌 정자이고, 전쟁이 나면 지휘본부가 된다. 이 장대 중에서 서쪽에 있는 이 서장대는 그 생김새가 독특하다. 수원화성에서 가장 높은 곳이어서 수원을 내려다보는 전망이 일품. 

  


 
바로 아래 보이는 학교 옆 한옥 건물들은 복원한 수원행궁이다. 수원화성을 보고나면 꼭 들러야 할 곳이다.

그럼 다시 서장대를 돌아보자. 

  



정말 씩씩한 건물이다. 건물 자체가 장군의 이미지다. 이 서장대 뒤에 아주 독특한 건축물이 있다. 서노대란 것이다.

  


 
노대는 특수병기인 쇠뇌를 쏘는 곳이다. 딱 봐도 군사 시설처럼 생겼는데도 그 모양이 근사하다. 저 위에도

올라가볼 수 있다.
서장대에서 수원의 전망을 즐기고 나면 이제 화서문쪽으로 향할 차례다. 서노대 뒤로 난 성벽길을 따라 간다.

본격적인 내리막이니 편한 마음으로 경치를 즐기며 내려가기만하면 된다.
  



화서문을 향해 가다보면 수원 화성의 기본 구조물들인 암문과 치, 각루 등이 연이어 나온다. 서암문은 정말 숨어있는

문인 암문의 느낌을 잘 보여준다. 성벽 중간에 약간 튀어나온 부분 안에 몰래 드나드는 문이 있다.  

  


 
잠깐 아래로 내려가 문 밖으로 나가 문을 본 뒤 다시 성벽길을 따라 걷는다. 

 



여기는 서포루. 벽에는 특유의 그림이 있다. 그림 속 동물 코 부분이 총안이다. 
 이번에는 서북각루다. 

  



각루 역시 전쟁 때 적들과 맞서 싸우는 포인트다. 이 각루를 보면 생활과 안보의 결합을 볼 수 있다.

 



저 각루 역시 평소에는 전망대 겸 감시탑겸 정자다. 평소에는 저렇게 기둥과 지붕만 있지만 전투가 벌어지면

사이에 나무 벽을 끼운다. 나무벽에는 총구멍이 있어 적의 공격을 막으며 공격을 한다.

그런데 저 앞에 있는 작은 탑 같은 것, 뭘까?
한옥을 잘 아시는 분들이라면 너무나 잘 아는 저 작은 벽돌기둥은 당연히 굴뚝이다.  

왜 굴뚝이 저기 있냐고? 저 각루에는 온돌이 있다. 그러니 굴뚝이 있는 것. 

  



 
지난 가을 이 부근 성벽길이다. 하얀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는 경치를 보는 맛이란.
계속 산들바람을 벗삼아 내려가면 드디어 수원화성의 서쪽문 화서문이 등장한다. 위에서 보는 화서문은 그 분위기가 그만. 

  



앞에 튀어나온 옹성 구조를 여기서 잘 볼 수 있다. 화서문 뒤로 솟아오른 건물은 화성을 대표하는 공심돈,

그러니까 서북공심돈이다. 공심돈도 일종의 포대다.
 



잠시 성벽에서 문을 바라본다. 이 아름다운 성을 쌓은 정약용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그는 학자인 동시에 놀라운

건축가였다. 

 




수원 성길은 저 문안으로 이어진다. 평소 숭례문이나 흥인지문 보면서 위에 올라가보고 싶었던 분들,

여기서 그 맛을 경험해볼 수 있다.  

  



화서문 내부다. 생각보다 좁다. 그 이유는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노출되는 공간을 최소화했기 때문이다. 지붕을 최대한 낮췄고, 바깥을 바라보는 부분을 가늘고 길게 했다.
 


이제 화서문을 뒤로하고 북쪽으로 길을 따라 간다. 뒤를 돌아보면 화서문이 의외로 아담해보인다. 바깥에서 앞의 옹성까지 보면 그리도 웅장한데, 성 안에서는 이렇게 포근하게 만든 것. 그 점이 화성의 매력이기도 하다.
 


 
성 안으로 주택가 있고 성벽 위로는 각종 각루와 포사가 이어진다. 화성이 있기에 수원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제 화서문을 지나면 수원 화성 성문 중에서도 가장 웅장한 장안문으로 갈 차례다. 그 중간에 북포루와 북서포루가 있다. 

  




앞서 본 포루와 비슷하다. 특유의 벽 그림이 매력적이다.
화성은 성벽길에 깃대가 있는데 방향마다 깃발 색깔이 다르다. 이쪽 북쪽은 하얀색 깃발.
그리고, 수원 화성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장안문이 그 웅장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화서문에서 장안문은 그 거리가

짧아 연이어 나오는 두 문을 만나는 재미와 비교해보는 즐거움이 있다. 장안문쪽은 깃발 색깔이 검정색이다. 

  


 
장안문은 수원 화성에서도 아주 중요한 문이다. 그 이유는 가장 큰 문이기 때문이다. 가장 크고 중요한 문이어서

아주 신경을 많이 썼고 건축적으로도 압도적으로 연출했다.
장안문 역시 그 안에 들어가볼 수 있다. 이 문은 그 바깥으로 나가서 멀리서 한번 봐주고 가야 한다.  

  



역시 문 앞에 옹벽이 있다. 그 길을 따라 문을 구경한다. 

  



장안문 역시 내부는 어두운 편. 문 아래로 내려가 성 밖으로 가볼 차례. 

  


 
옆으로 난 계단으로 일단 내려간다. 

  



크다. 화서문과는 역시 비교가 안된다. 저 문 안으로 나가자. 

  



 
무지개문 안으로 향하면 바깥 옹성문이 보인다. 이중 구조 문이 연출하는 매력이다. 


  



문과 문 사이에서 다시 장안문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다시 옹성 문 바깥으로 나갈 차례다. 

  



이게 바깥에서 본 장안문의 모습이다. 앞서 본 팔달문과 비슷하면서 더 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이 바로 이 장안문이다. 서울 도성의 정문인 남대문보다 오히려 더 크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뿐. 정조가 수원성에 얼마나 애착을 갖고 정성껏 지었는지 알 수 있다.
 
저 문을 좀 더 제대로 보고 싶어 건너편 건물에 올랐다. 역시 건물은 맞은 편 높은 곳에서 봐야 제맛이다.   



수원성의 매력은 성벽 위를 끝까지 이어져 걸어다닐 수 있고, 그 길이 성문 같은 구조물 안으로도 이어지며, 중간중간 볼거리들이 속속 나타나는 데 있다. 모든 읍성들이 다 이렇게 성벽을 거닐 수 있지만 수원성처럼 크고 화려한 성은 우리나라에 없다.
 
팔달문에서 시작해 언덕을 낑낑 오른 다음 시원한 바람 맞으며 화서문 거쳐 이곳 장안문까지 이르면 수원성의 꼭 절반을  돈 셈이다. 남쪽에서 시작해 북쪽에 이른 것이다.
수원성의 매력은 지금까지보다 앞으로 남은 나머지 절반에 오히려 더 많이 몰려 있다. 지금까지는 수원성과 친해지는 과정이고, 이제부터는 수원성만의 매력을 볼 차례다. 진짜 수원성 나들이는 여기서부터다. 
다시 장안문 안으로 들어가 나머지 여행을 시작하자. 

 [출처 : 한겨레블로그] [펌]